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수 전쟁 (문단 편집) ==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운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tu.5011.net/3140341458626013.jpg|width=100%]]}}}|| || '''[[문제(수)|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 || [[수나라]]의 [[문제(수)|수문제]]는 589년, 남조 시대 마지막 왕조인 진(陳)나라를 멸망시켜 [[남북조시대]]의 혼란을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수하였다. 중국을 통일시키고 내치를 통하여 나라를 안정시킨('''개황성세''') 문제는 장성 이북에 있던 [[돌궐]]과 [[고구려]]를 장차 중국을 위협할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하여 이들을 주시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는데.. 시간을 6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607년 8월 북방 초원에 가을이 왔을 때, 양제는 선물을 가지고 돌궐 계민 칸(可汗)의 천막 궁정으로 찾아갔다. 이것은 일종의 답방이었는데, 그해 초 유림(楡林)에서 변경전략가 [[배구(수나라)|배구]](背矩)가 포섭한 동돌궐의 계민 칸으로부터 양제가 충성의 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수 문제와 초원 전문가 장손성(長孫晟)의 끊임없는 돌궐 분열공작의 결과였다. 서돌궐의 달두(達頭) 칸이 동돌궐의 칸과 결별하고 스스로 칸을 칭하자, 583년 수나라는 서돌궐의 달두 칸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돌궐은 동서로 분열되었고, 향후 양국은 계속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했다. 참고로 장손성은 후대 당태종의 장인이며 장손무기의 아버지다.][* 585년에는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서돌궐에 맞서 힘겹게 싸우던 사발략(沙鉢略) 칸을 지원했고, 사발략 칸을 계승한 동생 막하(莫何)가 죽고 그를 이은 도람(都藍)에게 계민 칸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계민 칸이 밀려나자 수 문제는 계민 칸에게 오르도스 지역에 땅을 주어 경비를 맡겼다. ][* 또한 돌궐계 유목민인 철륵에 공작을 펴 서돌궐의 달두 칸을 죽게 만들었다. 수나라는 끊임없이 돌궐의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을 떨게 했고 수나라의 수도를 위협할 만큼 강력했던 돌궐을 끊임없이 약화시켰다.] 첫 만남에서 계민 칸을 애타게 기다리던 이야기는 양제의 시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도 나온다. >"借問長城候(차문장성후) [[탱리고도선우|單于]][* 선우(單于)는 돌궐이 아닌 흉노의 임금을 이르는 말이긴 하나, 북방 유목 민족들의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게 본래 모호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중원 북방 이민족 수장'이라는 일반적 의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入朝謁(선우입조알) 濁氣靜天山(탁기정천산) 晨光照高闕(신광조고궐)[* [[http://www.andongkwon.pe.kr/coding/sub3/sub3.asp?bseq=7&cat=-1&sk=&sv=&yy=all&page=23&mode=view&aseq=7809#.Y17r7mnP3mh|출처]]] >"장성의 병사에게 물으니 선우(계민 칸)가 들어왔다고 한다. 탁한 기운은 천산에 가라앉고 새벽의 빛은 고궐([[오르도스]])을 비춘다." 계민 칸을 곧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은 양제에게는 탁한 공기가 금방 맑아진 것만 같고, 새벽빛이 땅을 비추는 것처럼 기쁜 일이었다. 양제로서는 북변이 안정되니 이제야 안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계민 칸의 궁정에 도착했을 때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고구려의 사신이 먼저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고구려는 수나라의 영토를 유린해왔고, 북방 초원에까지 촉수를 뻗치고 있는 고구려는 양제에게 치욕감을 주는 존재였다. 수 제국을 능멸하고도 무사한 나라는 고구려밖에 없었다. 이 고구려 사신은 평양성에서 1,500km나 떨어진 이곳에 자신보다 먼저 와서 계민 칸과 사사로이 통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과거 돌궐은 수 왕조의 목을 쥐고 있던 무서운 존재였다. 수나라의 모체였던 북주(北周)가 북제(北齊)를 통합하기 이전부터 그러했다.초원을 통일한 돌궐은 북주의 북제 공격을 지원하기도 했다. 돌궐 목간 칸 치세에 북주는 매년 10만 필의 비단을 상납했다. 북제 역시 그러했다. 양국은 돌궐이 상대 국가를 지원할까 봐 항상 두려워했다. 돌궐의 칸은 두 나라로부터 갈취한 비단을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에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양제가 초원에 행차한 시기는 계민 칸이 수나라의 원조를 받아 그의 동포들을 제압하고 초원을 어느 정도 장악한 때였다. 그런데 수나라가 힘들게 복속시킨 칸에게 고구려 사신이 찾아와 이간질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수나라의 배구는 양제의 말을 고구려측에 전했다. >'''"돌아가거든 너희 고구려 왕에게 직접 수 조정에 와서 신하의 예의를 표하라고 전하라. 그렇지 않으면, 돌궐 기병을 동원해 고구려를 정벌하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609년 계민 칸이 죽고 그의 아들 시필 칸이 즉위했다. 수나라의 침공이 확실해진 시기에 고구려에게 기회가 왔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수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약했다. 고구려는 젊은 시필 칸에게 사절을 보냈고, 과거 수나라가 자행한 돌궐 분열정책에 대해 충분히 상기시켰다. 고구려 사신은 시필 칸에게 결정적인 충고도 하는데, 바로 시필 칸의 동생을 또다른 칸으로 세워 경쟁시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적의를 갖게 된 시필 칸은 곧바로 수나라와의 의례적 관계를 청산한다. 양제는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나며 보급을 자급자족하는 동돌궐의 유목민 기병을 고구려 침공에 동원하려 했으나, 이는 고구려의 공작으로 무산되었다. 고구려에 대한 징벌은 오직 수나라 혼자만이 걸머지는 운명이 되어갔으며, 이는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